사실 이 글을 독후감이라 칭하는 것은 옳지 않고, 청후감이라 해야 맞을 듯하다. 나는 이 책을 Audible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사실 이 오디오북의 길이는 단 4시간 남짓. 그래서 그런지 듣는데 몇일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번 듣고 난 지금, 사실 내가 이 내용 전부를 잘 이해하고 글을 쓰는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끄적거려 본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Tenet을 봤고, 시간과 엔트로피의 상관관계에 대해 궁금해하던 중, 마침 남아있는 Audible 포인트가 있었고, 어차피 멤버십을 끝낼 마당에 들어보자는 식이었다. 생각지도 않던 Benedict Cumberbatch (셜록홈스와 닥터 스트레인지로 유명한)가 읽어주는 책이어서 읽어주는 목소리도 듣기 편하다. 다만 약간의 영국식 엑센트 덕분에 집중하면서 들어야 하는 편. Audible 오디오북으로 들으시려거든 참고하시면 좋겠다.
시간은 우리에게 믿음직한 친구다. 그리고 시간은 정확하고 꽤 절대적인 지위를 갖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전세계적으로 약속된 시차는 있지만, 일단 세계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도 화상회의 시간을 잡고 실제로 그 시간이 되면 화상회의를 동시에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구의 시간, 혹은 우리 개개인이 인식하는 시간일 뿐이다.
물리학에 따르면, 시간의 가장 작은 단위는 플랑크 시간. 세계는 사실 연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빨리 깜빡이는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마치 영화를 찍을 때 Frame per Second(FPS)의 개념처럼 (보통 우리가 보는 애니메이션이 24 Frame per Sec, 즉 1초에 24장면이 들아간다고 한다) 세상을 플랑크 시간으로 보면 1.854858×10^43 FPS라고 하니 우리가 인식하는 수준에서는 사실 연속성을 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개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빠르게 깜빡거리는 세상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상대성이론에 근거하면 이동하는 물체 위에 있거나, 중력의 영향을 받는 상태에서는 시공간의 왜곡이 일어나게 된다. 또 시간이라는 것은 결국 물체와 물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를 얻는데 (아주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몸은 대사를 하고 소화를 하고, 심지어 죽어서도 썩어가는 상호작용 등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열역학적 측면에서 볼 때 (지구에 있는 우리는 지속적으로 태양에서 에너지를 받고 있어서 당장은 느끼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우주는 계속해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무작위로 퍼져나가면서 결국 모든 물체가 끝끝내 상호작용을 하지 못할 만큼 퍼져나갔을 때, 시간도 같이 소멸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엔트로피의 법칙인데 결국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의 선, 또는 차원으로 인식하고 있는 개별적 요소가 아니라 물체와 물체, 그리고 그 상호작용에 귀속되어 있는 사건들이라고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즉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절대적이고 믿음직하게 언제나 흐르고 있는 시간의 개념은 허구이고, 단지 물체와 물체가 상호작용하는 그 사건에 귀속되어 있는 시간만이 남게 된다.
개개인 또한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과거는 단지 우리의 뇌속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의 조각들로 재구성되는 것일 뿐, 과거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미래라는 개념도 우리의 뇌가 예상하고 예측하는 개념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현재도 우주적 관점에서는 아주 짧은 깜빡임일 뿐이므로, 우리가 인식하는 자아와 연속성은 매우 추상적인 개념일 뿐 아니라 인간의 생존을 위해 그렇게 인식되도록 선택의 과정들을 거친 산물일 뿐이다.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인식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 또는 물체와 상호작용 하면서이다. 나의 이름은 나를 부르는, 나를 인식하게 하는 글자 또는 소리에 불과하며, 내가 아니다. 나는 하나의 시선, 하나의 과정의 집합과 세분화를 통한 다른 사람들의 투영, 그리고 하나의 기억이다. 이 세 가지가 모여 나는 하나의 시스템이고 과정임과 동시에 비로소 하나의 객체로 인식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개념들처럼, "나"라는 객체라는 개념도 사실 약속된 사회 시스템에서 정의된 것으로 내가 나로 온전히 존재하는 것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안에서만 가능할 뿐, 개별적으로, 혹은 우주적 관점에서 나라는 하나의 객체는 사실 존재하지 않거나 무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내가 살아가는 인생 혹은 삶의 시간들 역시 상호작용의 연속일 뿐,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우리가 정박으로만 이루어진 4분의 4박자 노래를 들을 때에도, 이 것은 마디마다 단지 네개의 개별적 음이지만, 우리가 이 안에서 음악을 연속되게 들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뇌가 이 음들을 기억하고 예상하고 이어서 음악으로 만들어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연한 계기로 생각지도 않았던 책을 예상도 하지 못한 배우의 목소리로 듣다가 나의 온전한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지만, 사실 유물론자로써 크게 놀라진 않았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면서 하등 필요 없을 수도 있는 이 우주적 시간에 대한 개념은,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하더라도, 이 책을 읽는 것이 영화 Tenet을 보는 것만큼이나 재미있었다. 물론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지만. 하도 시간을 가지고 장난을 쳐 놓기를 좋아하는 놀란 감독의 영화를 볼 때도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이었는데 엔트로피니 열역학의 법칙이니 하는 글을 써놓고 보니 물리학에는 영 소질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절하게 느꼈지만, 시간에 관한 물리학을 어려운 수학공식을 사용하지 않고 철학적 의미로까지 연결을 시도한 이 책은 적어도 이 분야의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시간이 지나 다시 컴버배치 형의 목소리를 들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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