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도발적이라고 생각했다. '미래의 시체'는 나를 포함한 독자를 지칭한 것이니까. 누군가에게 죽으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심각한 저주에 속하는데, 책은 제목에서부터 나를 포함한 모든 독자가 죽을 것이라 예고한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책의 작가인 샐리 티스데일은 적어도 독자를 저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우리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든 말든, 굉장히 자연스러운 우리의 종착지이니까. 알려주는 것이다. 넌 죽을 거야. 자연의 이치 그대로.
책은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한달 후, 일주일 후, 혹은 내일, 혹은 이 글을 읽는 중간에도 죽을 수 있다. 마치 초마다 우리는 100만 면체 주사위를 던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던진 주사위에서 '죽음'이 나오면 그 순간 우리의 삶이 끝나는 것이다. 그 주사위는 차 길을 건너거나, 당뇨에 걸리거나, 혹은 그냥 자연스럽게 나이가 듦에 따라 면의 수가 적어지고, 필연적으로 우리는 '죽음'이라는 면을 마주해야 한다. 재수가 없으면 그 '죽음'은 지금 심장마비라는 형태로 나올 수도 있으므로 우리가 죽음에 면역인 상태는 없다.
이 필연적 결과 앞에 사람들은 두가지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 '유한한 삶이므로, 그 소중함을 알고 열심히 살아내야 한다', 혹은 '어차피 끝날 삶이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아내야 한다.' 이 태도들 사이에서 어느 쪽을 믿으며 살 것인가는, 궁극적으로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를 먼저 정의해내는 것과 같다. 끊임없는 성취를 통해 다수가 해보지 못한 것을 경험하며 사는 삶이 좋은 삶이라 정의한다면, 첫 번째 태도를, 그 특별한 성취들조차 죽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으므로, 해보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보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두 번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보인다. 물론 이 두 가지 태도 사이 어디쯤에 위치하며 자신에게 적당히 맞는 삶을 설정하여 나아가는 것이 보통일 테지만.
하지만 책은 사실 이런 생각들에 관심이 없다. 이것은 삶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어떤 태도로 얼마만큼 성실하게 살았건, 우리는, 나와 내 가족, 친구들 모두,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 한다.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이니까. 열심히 성취하며 살아가든, 욕망을 채우며 마음껏 욜로 하든, 우린 늙고 병들며 언젠가 성취나 욕망 따위가 의미 없는 순간은 찾아와 누군가에게 병든 몸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다. 통장 안에 10만원이 있든 1,000억이 있든, 대소변을 못 가릴 정도로 죽음에 근접했을 때 기저귀를 차고 심지어 남의 손을 빌어 그 기저귀가 갈아짐을 당할 준비가 되었는지. 책이 관심 있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공평하게 찾아오는 이 순간에 대한 것이다. 내 가족의 대소변을 받는 것은 고된 일이지만, 우리는 할 것을 다한다는 소명감, 또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주체가 내가 되어 가족과 친구의 손을 빌어 이 기본적인 행동조차 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원천적인 나의 존엄성에 대한 의문이 들지 않을까.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인가. '미래의 시체'로써 죽은, 無의 존재가 되는 것보다, '미래의 쓸모없는 인간'으로 연명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책은 분명히 말한다. 그런 순간은 온다고.
다행히도 죽음이 가까워진 순간에 육체적 고통이 극심한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이미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약물은 여러 가지가 있고, 죽음이 가까워진 사람에게는 이 약물들의 후유증을 걱정해줄 필요도 없다. 죽진 않았지만, 곧 죽을 사람이니까. 이 순간이 되면 누군가의 판단에 의해 나는 사실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일까. 그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고, 진통제는 마음껏 줘도 되지만, 죽어가는 사람에게 조심해야 할 말은 또 있다고 하는 것이 모순되게 느껴지기는 했다. 이런 모순들까지 더해서 죽음에 대한 나의 불안은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압도적으로 정신적이며, 딱 떨어지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안심시키고, 고통을 줄여주고, 경청하는 것 외에 주변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수발을 드는 것뿐이겠구나 정도로 그 순간을 짐작한다.
이렇다 보니 책을 읽으며 좋은 죽음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려 하다, 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긴 하다. 과연 내가 계획한 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상황에 맞춰, 나를 돌봐주는 사람들의 처지에 맞춰, 너무 힘들게 하지 않고 대충 죽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내 장례식에 대한 계획도 그냥 상조회사에서 알아서 해주겠거니. 가뜩이나 나도 죽어서 경황이 없는 주변 사람들이 배산임수까지 생각할 겨를이 있을까. 그냥 되는대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어차피 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산자를 위한 것이니까. 죽은 자는 죽어서 모르지만, 남은 사람들은 장례라도 잘해서 죽은 자를 기림으로써 잘 보내주었다고 서로 위로라도 하는 절차이니까.
사실 책은 '미래의 시체'가 될 나에게 어떤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정답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었다. 삶이 그렇듯, 죽음이라고 정답이 있을 리는 없고, 그 것이 책 한권에 있을리는 더더욱 없으므로. 책으로 배운 죽음이라니. 연애든, 인생이든, 죽음이든, 결국 경험으로 배워내야 하는 것들은 있다. 다만 책은 그 순간들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나와 내 가족에게 닥쳐올 순간들을 그려주었고, 더 넓은 이해와 관점으로 죽음을 바라볼 기회를 부여했다. 무엇보다 선명한 메시지는 이 것: "Memento Mori". 그대 역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글을 대충 정리하고 나니,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의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다.
상헌 (송강호 분): 지옥에서 만나요.
태주 (김옥빈 분): 죽으면 끝.
천국이든, 지옥이든, 끝이든, 죽음에 또 하루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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